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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 19장 감화자 6~10화 본문

마법사의 약속/메인 스토리

2부 19장 감화자 6~10화

삐까스 2023. 7. 6. 00:48

6화

꿈같은 기적을

 

피가로

……윽, ……하…….

 

…………,

《폿……, 시데오……》

 

………….

 

……하…….

 

손발을 덮친 격한 떨림도
이윽고 멈췄다.

천천히 감각이 없어져 간다.
몰아치는 눈에 반신이 덮였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을 떠난 건가.

잃어버린 고향의 백성들.

속수무책으로
내 이름을 부르고 기도했을까.

절망과 공포를 눈앞에 두고
위대한 것들이
지켜줄 것이라 믿고.

매서운 눈보라 소리에 섞여
어딘가 멀리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환청일까.

아니, 사람 목소리다.
쓰러질 것 같지만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하얀 눈이 휘몰아치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본다.
큰 새 같은,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레녹스
……피가로 님…….

피가로 님……!

레녹스다.

그것은 빗자루를 탄 레녹스였다.
놀랍게도, 팔에는
파우스트를 안고 있었다.

아까 환영처럼 본
지하수로에 엎드려 있는 파우스트,
그 자체였다.

나는 만나지 못했지만
그들은 만났다.

그리고 구할 수 있었다.

안도와 피로가 완만하게 덮쳐온다.
하지만 파우스트를 보는 순간
핏기가 가셨다.

온몸에 중상을 입고 있었다.
즉시 치료하지 않으면 생명에 지장이 생긴다.

하지만, 어떻게…….

동요하는 사이,
레녹스는 내 눈앞에
의식이 없는 파우스트를 내밀었다.

똑바로,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레녹스
피가로 님,
파우스트 님을 부탁합니다.
저는 동쪽 마법사들을 찾아볼게요.

피가로
아…….

레녹스
지금은 의식이 없지만
등과 목, 어깨, 오른쪽 허벅지에
심한 상처가 있습니다.

등의 상처가 가장 심해
처치를 했지만 출혈이 멈추지 않아요.
부디, 부탁드립니다.

레녹스는 머리를 숙이고
파우스트를 나에게 맡기려고 했다.

내 손을 보고 의아한 듯이 눈살을 찌푸린다.
마법으로 체온을 지킬 수 없었던 나의 손가락 끝은
얼어서 자줏빛으로 변색되어 있었다.

어둠 속이니 확실하게
확인했을 거라 생각되진 않지만,
위화감을 깨닫고 무언가 말을 건넨다.

레녹스
피가로 님…….

그때, 돌풍이 불었다.
레녹스가 바람에 비틀거린다.
파우스트를 떨어뜨릴 것처럼 보였다.

반사적으로 양팔로 받치려다
엉켜서, 받지 못하고
눈 위에 주저앉는다.

피가로
…………윽!

격통이 일었는지
파우스트가 의식을 되찾았다.

파우스트
……으, 으윽…….

레녹스
파우스트 님!

파우스트
……괜찮아…….
시노……, 시노 쪽을…….

레녹스
알겠습니다.
피가로 님, 부탁드립니다.

피가로
………….

얼어붙은 목구멍으로 외친 목소리를
눈보라가 쓸어버렸다.

레녹스의 등이 멀어지면서
새하얀 눈과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기다려 줘.
마법을 못 써.

그렇게 소리치지 못한 것은
파우스트를 절망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의로 병세는 쉽게 악화된다.
살아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살고자 하는 의욕을 잃고 만다.

어떻게 눈치채지 못하도록
최선의 응급처치를 할 수 있을까.
나는 조심조심 파우스트를 살폈다.

그 순간, 할 말을 잃었다.

핏기를 잃고 창백한 얼굴에,
파우스트는 안도감을 띠고 있었다.

내가 있으면 반드시
도움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과거, 나를 따르던 제자였을 때처럼.

눈 아래로 사라져 간
잃어버린 고향 백성들처럼.

아아, 나는 쭉…….

그 눈빛에 화답하고 싶었어.

피가로
……괜찮아…….
괜찮아…….

반드시, 구해줄게.

뜨거운 충동이 가슴 안쪽에서 올라온다.

모든 걸 잃은 눈사태의 날에도
같은 말을 전하고 싶었다.
괜찮아.

내가 있잖아.

내가 여기 있어.

차가운 뺨을 쓰다듬으면서
주문처럼 반복했다.
파우스트는 다시 의식을 잃었다.

피가로
……읏, ……하…….

뜨거운 눈꺼풀이 얼어서 아프다.
나는 파우스트를 옆으로 눕혔다.

등의 열상이 깊다.
세 개, 날카로운 선이 그어져 있다.

나는 품속에 숨겼던 칼로
손바닥을 베었다.

설원에 붉은 마법진을 그린다.

얼어붙어 맑은 공기.
북쪽 나라의 대기를 노려보았다.

잔혹하고 냉철한 북쪽 나라의 정령들에게
내 냄새를 떠올리게 한다.

피가로
부박[각주:1]한 것들…….
내 이름을 떠올리고 후회하도록 해라.

얼어 붉어진 손가락 끝을
마법진과 파우스트 위에 얹는다.

눈꺼풀을 감고 주문을 외웠다.

피가로
《폿시데오》

눈보라 소리만 울리고 있다.

남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꿈같은 기적을 일으키고 싶었다.

명성이나 자존심 때문이 아니야.
영예나 존경 따위 필요 없어.
설 자리가 없어도 돼.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고 싶었다.
그냥, 그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어.

나를 믿는 사람들이
눈동자를 빛내며 바라보는
기적을 보여주고 싶었어.

조용히, 눈꺼풀을 뜬다.

눈보라를 거슬러
마법진 위에
작은 바람 고리가 생겨나고 있었다.

바람의 고리는 점차 크게 퍼져
왕관처럼
우리를 감싸준다.

파우스트의 등에 난
끔찍한 상처가 금세 아물어 간다.

엄청난 풍압은 점점 늘고
바람의 고리는 죽음의 호수만큼 확대되어 간다.

내 손끝에 조종되어
북쪽의 정령들이 환희하고 있다.

혀를 차며 나는 주위를 노려보았다.

피가로
다시는 명령에 거역하지 마라.

광조하며 부글부글 싸라기눈이 춤을 춘다.
그것은 파문처럼 번져
멀리 있는 나무를 베어 쓰러뜨렸다.

눈보라가 치고 땅울림이 울린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떻게든, 마력이 돌아왔다.

파우스트의 치료에 전념했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누군가의 대신도 맡은 모양새다.

잃지 않아서 다행이야.
신뢰를 잃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법관에 돌아가면, 이야기를 하자.
그동안 못했던 많은 이야기를.

미틸과도 미래의 이야기를 하자.
아이작은 죽이자.

치료한 파우스트를 안고
나는 하늘로 날아올랐다.
레녹스의 행방을 찾는다.

북쪽 나라의 공기는 맑고,
순순히, 거침없이,
모든 것을 내게 전해 주었다.


에바
《아우라레기우스》

아이작
《애니멈 · 베크사트》!

……큭, 크아아악……!

에바
흥……. 벌레 자식!

아이작
큭……. 쿨럭……!
……제길……!
죽기 직전인 노파가……!

에바
죽는 건 네놈이다.

……소피, 용서해 줘…….
널 의심한 걸…….

지금, 저 녀석을 인도할게.
저승에서 마음껏 때리렴.

《아우라레기우……》

아이작
기다려……!

에바
목숨 구걸이라니.
최후의 긍지마저 잃었나?

아이작
……큭, 쿨럭쿨럭……!
거……, 거래다.

그 여자…….
이 파란 돌의 주인이었던 녀석의
마지막 말을 알고 싶지 않아?

에바
………….

아이작
그 여자의 최후는 나만 알고 있어.
나만이……. 쿨럭…….
나밖에 알려줄 수 없다고.

에바
……그 대신, 목숨은 살려달라?

아이작
……나는 병이 있어. 곧 죽을 거다.

에바
알 바야. 내가 죽일 건데.

아이작
………….

에바
……말해.

아이작
……윽, 그는…….
에바…….

……으, 쿨럭…….

에바
……내 이름을? 뭐라고?

그 아이는, 뭐라고 말한 거야.

아이작
에바…….

에바
………….

아이작
《애니멈 · 베크사트》!

에바
…………! 아아아악……!

아이작
걸려들었어!

걸려들었구나……!

에바
아아악……! 아아아……!

아이작
그런 거, 잊어버렸다고!
그대로 돌이 되어라!

에바
……아아아……!

……으, ……소피…….

아이작
아하하! 꼴좋다!
돌이 됐어!

대마녀 에바를 돌로 만들었어!

훌륭한 마나석이 이렇게나…….
역시, 지혜는 최고야!

다음은 돌아가서 피가로를…….

………….

……그만 두자.
그 녀석은 현명하니까, 무서워.

없으면, 쓸쓸해.



7화
같은 올바름 속에서

브래들리
………….

 

에바?

 

네로
……읏, 왜 그래……?

브래들리
……아니, 설마.

아무것도 아니야. 가자.


루틸
하아……, 하아…….
오즈 님 일행을 바로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미틸
자고 있는데 깨워서
죄송해요.

리케
아니에요.
동쪽 마법사에게 큰일이 생겼다면
당연한 겁니다.

하암…….
죄송해요, 하품이…….

루틸
아서 님과 카인 씨는요?

오즈
아서는 중앙 나라에 돌아갔다.

미틸
카인 씨는요?

리케
마법과학병단 본부에 간 참이에요.
필요한 정보를 듣기 위해
이야기를 해보겠다 했어요.

루틸
그럼 친목을 돈독히 하기 위해
술집 같은 곳을
가셨을까요?

리케
아침에 돌아올 거예요.
전에 네로가 그랬어요.

오즈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리케
그렇네요.
지금이라면 아직 밤에 귀가하는 거예요.

오즈
피가로가 이 단추를 나에게?

루틸
네.
오즈 님이라면 행방을 알 수 있다고…….

오즈
………….

아직 날이 밝지 않았으니까.

리케
알고 있어요.
두 번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미틸
날이 밝으면 오즈님의 마법으로
비의 거리에 데려가 주시는 건가요?

비의 거리에 있는 여관에서 사라졌어요.
동쪽 마법사들도,
피가로 선생님 일행도…….

오즈
간단하다.

미틸
감사합니다!

리케
아…….
낮에 갔던 건물,
아직 불이 켜져 있어요.

미틸
어디인가요?

리케
보세요, 저쪽 건물이에요.

미틸
진짜다…….

저게 마법과학병단 본부……?

리케
네.

미틸
서쪽 나라는 마법과학 덕분에
점점 발전해서 군인들도
강해지고 있다고 했어요.

히스클리프 씨가.

루틸
히스는 동쪽 나라
대귀족의 아드님이었지.

무인 가문이라고 들었어.
무슨 일이 있으면 동쪽 나라를 위해
전장에서 지휘를 한대.

리케
무슨 일 없어도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거대한 재액〉과
싸우고 있는데.

인간끼리는 사이좋게 지냈으면 좋겠어요.

루틸
그렇지…….
……어라?

오즈
왜 그러지.

루틸
거대한 그림자가 발 밑을 움직여서…….

미틸
형님, 저거예요!
호화로운 마차가 하늘을 날고 있어요!

루틸
정말이네……. 굉장해…….

리케
앗……!

미틸
왜 그러세요?

리케
방금 마차 창문으로 보인 거
무르 아니었나요?

미틸
무르 씨?
그럼 마차에 타고 있는 건
서쪽 마법사분들인가요?

오즈
아니다.

저건 무르 같지만
무르가 아니야.

리케
의미를 모르겠어요.

오즈
………….
무르지만, 무르 본인은…….

루틸
앗……!
마차에 공주님이 타고 계시네요.

리케
공주님, 보고 싶어요.
하늘을 날아서 보러 가도 될까요?

미틸
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루틸
공주님이 이런 한밤중에
어쩐 일이신 걸까…….

오즈
………….


무르
정말이지, 너한텐 질렸어.
아직 시제품이었는데.

노바
알티마를 위해선
더 많은 마나석이 필요해.

릴리아나
노바.
역시 그분을 데려와줘.

중앙 나라와 협상을 하다 보면
시간이 너무 걸려.

그분이 서쪽 나라에 계시는 동안
신속하게 일을 진행해야 해.


중앙 나라는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불씨가 될 수 있어요.

릴리아나
불사할게.
……노바.

노바
알았어.

무르
그럼, 나도 그들을 초대하러 가지.

릴리아나
무르.

무르
네가 원하는 건
현자님과 현자의 마법사잖아?

데리고 와줄게.
성대한 대관식이 될 거야.

자, 가자.
네가 좋아하는 끈이야.
그래 그래, 이리 와.

릴리아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무기 개발이 끝나면
바로 왕궁 연못에 가라앉혀 주겠어.


조심하세요.
박사의 일입니다.
어디서 듣고 있을지도 몰라요.

릴리아나
흥…….
고양이가 없으면 이동할 수도 없는 남자.
이슬만큼도 무섭지 않아.

………….

아리아…….

나쁘게 생각하지 마.
이건 속죄니까.


카인
(현자님은 무사할까…….
새가 된 자와
서쪽의 코르테제 성으로 향했는데……)

서쪽 나라의 부인
후후…….
중앙 나라 분은 성실해서
지루한 분들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카인 님은 말씀도 잘하시고,
자극적이고 정말 멋져…….

카인
하하. 고마워.

서쪽 나라의 부인
한 잔 더 받으시겠어요?

카인
잘 마실게.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다.
나는 국가와 주군을 지키는 것을
제일 우선시해야 할 정의라고 정했다.

그렇다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나라를 파는 척하는 것도
정의로울 것이다.

내 어머니가 아이를 지키는 걸 정의로 정하고
거짓말을 하는 것엔 눈을 감은 것처럼.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안겨
울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정말 건강한 아이였고,
그날 밤은 꾸중을 들은 것도 아니고
크게 다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어머니는 가만히 내 등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이 녀석! 그만하렴!
어서 오렴! 조심해!
어머! 대단하잖아!

언제나 밝은 어머니의 목소리가
그날 밤은 작고, 부드럽게 젖어
축축했다.

카인의 어머니
괜찮아……. 착하지…….

어린 카인
……착하지 않아.
친구한테 거짓말했어.

카인의 어머니
거짓말한 게 아니잖아.
마법사를 본 적이 있냐고 물어봤을 때
아무 말도 안 했을 뿐인걸.

어린 카인
거짓말이랑 똑같아.
다들, 말했는데…….
마법사가 보고 싶다고.

카인의 어머니
너는 뭐라고 말했니?

어린 카인
……나도 그렇다고…….

……내가 마법사인데…….

있잖아, 나, 거짓말해버렸어.
거짓말은 하면 안 되는 거지?
아빠도 그랬잖아?

카인의 어머니
그렇지.

어린 카인
검술 선생님도 그랬어.
친구들도, 거짓말쟁이는 싫다고 했어.
……그런데…….

카인의 어머니
싫었지만 엄마가 말한 걸
지켜준 거구나?

마법사라는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안 된다고.

어린 카인
……응…….

카인의 어머니
고마워, 카인.
엄마를 안심시켜 줘서
고마워.

어머니는 슬픈 것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평소라면 고맙다는 말을 듣는 건
기분이 좋은 일이었을 텐데,
어쩐지 슬픔이 깊어져 갔다.

어머니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친구들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생물이
되어버리는 게 무서웠다.

그날 밤, 나는 분명
처음으로 올바름에 대해
고민했다.

어린 시절, 올바름은 하나였고
그것만 지키면
자신은 괜찮을 것이라 믿었다.

악행은 하지 않는다.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

꿈을 목표로 전력으로 달려 나간다.
키워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만난 친구를 소중히 여긴다.

악의 유혹에 지지 않으면,
그런 건 쉽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몰랐어.

꿈을 꾸는 것과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
친구를 아끼는 것이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는 걸.

같은 올바름 안에서.


카인의 어머니
카인, 제발.
왕도에 가지 말아 줘.

영광의 거리의 기사로도 충분하잖니.
다들 아껴주는 데다,
영주님도 잘해주시고.

카인
그러니까 가는 거잖아.
모두 덕분에
겨우 잡은 기회야.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올게.
이 날을 계속 꿈꿔왔어!
괜찮아! 자랑스러운 아들이잖아?

카인의 어머니
너는 세간을 몰라…….
아무리 그래도 아직 너무 어려.

카인
걱정 말라니까.

카인의 어머니
왕도의 기사는 분명
소문만큼 대단하지 않을 거야.
이 거리에 있는 편이…….

카인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어릴 때부터 쭉
내 꿈을 응원해 줬잖아?

평소처럼 웃으면서 배웅해 줘.
걱정하지 마. 괜찮으니까.

카인의 어머니
………….

카인
왕도에서 출세해서, 뭔가 대단한……,
으음, 잘 모르겠지만 최고급품을 가져올게!
기대하고 있어!

카인의 어머니
……마음대로 하렴.

카인
………….
다녀오겠습니다, 어머니!

엇갈리기도 하고, 싸움도 있었다.
알 수 없는 것도.

내 말에 아무도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는 일도 있었고,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일도 있었다.

농담 삼아 누군가를 화나게 한다거나.
누군가의 농담에 잘 웃지 못하거나.

그래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사랑받고, 지켜지고 있어.

품위 있고 완벽한 방식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세계는 나를 사랑해주고 있었다.

태어난 거리에게 지켜지고 있다.

카인의 친구
카인, 잘 지내!
마음껏 이름을 알리고 와!

우리 중에 제일 출세했어!
힘내, 카인!

나도 부모님을 설득해서 왕도로 갈게!
먼저 가서 기다려줘!

영광의 거리의 주민
잘 다녀와!
몸 조심하고, 무공을 세우렴!

도시 녀석은 차가우니까,
무슨 말을 들어도 신경 쓰지 마!
정말 못 버티겠으면 돌아와!

카인, 잘 다녀와.
멋진 사람을 잔뜩 만나도
우릴 잊지 마…….

카인
안 잊어!
그럼 다녀올게!
다들 고마워!


정의는 하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모두 같은 규칙을 지키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그건 어린 시절의 환상이다.

정의는 여러 가지가 있다.
수많은 정의의 우선순위도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마다 다르기만 할까,
기분에 따라, 날에 따라
정의의 우선순위는 계속 바뀐다.

개인의 자유인가. 약자의 구제인가.
전통에 대한 경의인가. 평등의 정신인가.
법률인가. 자유인가. 권리인가.

정의를 지키기 위한 수단도 달라진다.
평화냐, 심판이냐, 관용이냐, 본보기냐.

그래도 나는, 내가 상상하는
좋은 사람이고 싶었다.

잘해주고 싶었고, 도와주고 싶었다.
이해하고 싶었고, 친구가 되고 싶었다.

대가 따위는 필요 없어.

누구에게 강요받은 것도 아니야.

부모님이나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지켜져 왔던 것처럼
사람을 사랑하고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오웬
바보 같아.
듣기 좋은 소리만 하고,
위선자인 기사님.

오웬에게 말하면
분명 이런 식으로 비웃겠지.

하지만 거짓말도 허세도 아니고,
내가 보아온 세상은 아름다웠다.

그 녀석이 본 세상엔…….

아름다운 게 없었던 걸까?



8화
믿는다는 것

오웬
곧 도착해.

 

아서
그런 것 같네.
멀리서도 풍요의 거리의 불빛이 보여.
정말 불야성이구나.

오웬
왜 옷을 갈아입었어?

아서
내 신분을 모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오웬
왕자님인데도?
왕자님은 인간 중에서
비교적 좋은 부류잖아?

아서
비교적 좋나?

오웬
북쪽에서는 강함으로 우열을 가리지만
중앙에선 신분으로 우열을 가리잖아.
평민보단 귀족, 귀족보단 왕족.

왕은 오즈나
미스라처럼 으스댈 수 있어.
그런데 왜 신분을 숨기는 거야?

아서
그렇게 으스댈 순 없어.
오즈 님이나 미스라도
거만하게 굴진 않잖아?

오웬
거만해.

아서
오웬도 으스대고 있어?

오웬
으스대.

아서
언제?

오웬
뭐? 항상 그래.
지금도 그렇거든?

아서
그렇구나!

오웬
응.

아서
오웬. 아까 했던 이야기 말인데…….

오웬
평범하게 대화를 이어가지 마!
거만하게 대해져도 괜찮은 거야?
왕자님이면서.

아서
모르는 정도가 좋아.
나는 신분적으로 으스대게 되는 것 같고,
피차일반이야.

오웬
왠지 짜증 나…….

아서
오웬, 조금 전 이야기 말인데,
좀 더 자세히 말해주지 않을래?

카인은 왜
명예를 버리려고 한 거야?

오웬
서쪽 나라 군인들에게
신용받기 위해서야.

아서
신용받기 위해서……?
명예를 가지고 있는 편이
신용받는 거 아니야?

오웬
흥…….
카인이랑 똑같은 소릴 하네.
너도 어리석구나.

내가 알려줄게.
카인 같은 남자는 신용받을 수 없다고.

신용할 수 있는 건 엉망진창으로 못났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창피하고,
금방 배신하는, 마음이 없는 무리들이야.

자신과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무엇이든 해.
그런 녀석들이 더 믿을 만 하지.

아서
왜?

오웬
당연하잖아.
규칙을 알기 쉬우니까.

규칙이라고 해도 법률과는 달라.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은
암묵적인 구조야.

사람의 본질이지.

아서
사람의 본질…….

오웬
그래. 자기보다 행복해 보이는 상대는
질투하고 미워하며 큰일이 있기를 바라.

남들 앞에서는 이룰 수 없는 욕망도
사람이 없는 곳에선 이뤄.
그런 인간의 본질 말이야.

다들 추악한 본성을 감추고 싶어 해.
그렇기 때문에 추악한 본성을 털어놓으면
안심하고 동료가 되는 거야.

그게 신용이고.

아서
………….

오웬
……하지만 기사님의 규칙은
아무도 몰라.

그러니 신용할 수 없어.
누구도 그 녀석에게 마음을 내주지 않아.
하하……. 바보 같아.

아서
……그래서 카인은
명예를 버리려고 하는 거야?
네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서?

오웬
그래. 실망했어?

아서
아니…… 걱정하고 있어.
카인답지 않네.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오웬
……무슨 뜻이야?

아서
평소의 카인이라면
네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오웬
뭐?
왜 딱 잘라 말하는 건데.

아서
카인을 신용하고 있으니까.
이게 신용이라고 생각해, 오웬.

카인은 신뢰의 의미를 착각하지 않아.

오웬
………….

아서
너도 실은
믿고 있지 않아?

오웬
누구를? 기사님을?
설마.

아서.
기사님을 꼬드긴 건 나야.
나는 계속 기다렸어.

그 녀석의 눈알을 뺏은 날부터
그 녀석이 본성을 드러내는 걸 기다렸어.
약하고, 어리석고, 비겁한…….

아서
그런데 기뻐하질 않네.

오웬
뭐?

아서
카인을 타락시켰는데
기뻐하지 않잖아.

오웬
기뻐하고 있어.
그러니까 널 데려온 거야.
더 최악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도박이나 색욕에 빠진 모습을
기사님은 너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겠지.

아서
………….

오웬
분명, 엄청 당황할 거야.
벌써부터 정말 기대돼.

아서
………….
너는 청개구리구나.

오웬
떨어뜨려서 죽일 거야, 왕자님.

아서
나는 조금 진지하게 받아들였어.
너는 심술궂은 걸 좋아하는 마법사고,
카인의 타락을 기대하고 있다고…….

카인이 조금이라도
기사답지 않은 짓을 하면
손가락질하고 비웃으려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걸 위해서
그를 따라다니고 있다고.

오웬
하하……. 그 말대로야.
착한 기사님이 자신의 본성을 보고
절망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그 모습을 보고 웃어주는 거야.

뭐야─.
이상적인 기사님은 역시
어디에도 없지 않느냐고.

세상은 구역질 나는 것뿐.
내가 정말 좋아하는 역겹고 최악인
거짓말과 악의가 넘칠 뿐.

꼴 좀 봐.

나는 속지 않았어.

아서
……사실은…….

믿고 싶었던 거 아니야?

오웬
………….

아서
그래서 나에게…….

오웬
하하……. 바보 같아.

아서
오웬.

오웬
시끄러워. 혀를 뽑아버릴 거야.

아서
나도 같아.
비슷한 걸 생각하고 있어.
믿고 싶어서…….

오웬
……뭘?

아서
………….

오웬.
너는 오래 산
북쪽 마법사지.

오웬
맞아.

아서
……오즈 님은…….

오즈 님은 어째서
마왕이라고 불리는 거야?

강하니까?
아니면…….

……소문대로, 이전에
이 세계를 유린했어?

너는 그 모습을
본 적 있어……?

오웬
………….

피가로나 쌍둥이는 뭐래?

아서
……진실을 물어본 적은 없어.
그저, 오즈 님의 불명예스러운 소문에
내가 화를 낼 때마다…….

그렇지, 하고 위로해 주셨어.
나는 멋대로 그걸 불명예스러운 소문의
부정이라고 믿고 있었어.

오즈 님도 아무 말씀 없으셨고.

오웬
후후……. 아, 그래.

아서
오웬은 알고 있지?
가르쳐주지 않을래?

오웬
글쎄, 몰라.
나중에 뭔가 생각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몰라.

아서
어째서…….
뜸 들이지 말고 가르쳐줘.

오웬
모른다니까.

아서
오웬. 부탁해.

오웬
오즈는 무서운 마왕이었어.
〈거대한 재액〉보다도 잔인하게
세계를 부쉈지.

아서
………….

오웬
내 말을 믿어?

아서
……거짓말을 했어?

오웬
어느 쪽이 좋아?
왕자님이 좋아하는 걸 골라봐.

좋아하는 걸 골라서,
좋아하는 세계에 살면 돼.
다른 한쪽에는 뚜껑을 덮고 외면한 채로.

아서
………….

그럴 수 있다면.

꼴 좀 봐.
나는 속지 않았어.

오즈 님을 믿어서 다행이야.
……그렇게 말하고 싶어.

오웬
흥…….

내려갈 거야.
떠들지 말고 조용히 따라와.
카인을 보여줄게.

아서
몰래 보는 거야?
방해하지 않고?

오웬
그래.
너도 최악의 기분이 되었으면 하니까.


서쪽 나라의 장교
아하하!
재밌는 남자네, 카인.

장군이 여기 있었다면
소개했을 텐데.
아쉬워.

카인
바넷 장군인가.
마법과학병단을 통솔한다고
했었지.

니콜라스가 신세를 졌을 거야.

서쪽 나라의 장교
그래. 원래라면 오늘 중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는데,
예정이 늘어나서…….

뭐? 돌아오셨어……?
풍요의 거리에 돌아오셨다네.

카인
그거 고맙네.
지금 바로 만날 수 있을까?

서쪽 나라의 장교
장군 각하라고.
그렇게 가볍게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야.
하지만…….

사교적이고 소탈한 분이시니
이 장교 클럽에 들른다면
소개해 드릴 수는 있을 거야.

카인
정말?

서쪽 나라의 장교
그래.
하지만 오늘 밤은 늦었으니까.

카인
늦게까지 일하던 날이
술이 더 당기는 법이잖아.
장군이 좋아하는 건?

춤은 좋아해?
출 수 있는데.

서쪽 나라의 장교
아하하, 춤춰줘.
장군은 분명 통속 소설을 좋아하시지.

카인
신기하네. 나도 좋아해.

서쪽 나라의 장교
정말?

카인
그래. 눈앞에 있으면
큰 소리로 낭독하고 싶어.

서쪽 나라의 여성
어머, 듣고 싶어라.
외설스러운 대사도 잔뜩 있는데.

카인
완전 괜찮아.
어떨까. 장군의 귀에 들어가면
흥미를 가져줄까?

서쪽 나라의 장교
뭐, 피곤하지 않으시다면…….
분명 이걸 좋아하셨어.
젊은 메이드가 주인공인…….

카인
그래, 빌려줘.
그럼 여기서 낭독해 볼게.

서쪽 나라의 장교
오오! 재밌겠군!

서쪽 나라의 여성
카인 님, 귀여우셔.

카인
시작.
그날 밤, 나는 첫 체험에
풍만한 가슴을 뛰게…….

아서
실례할게.

카인
…………!?

(아서 님……!
왜 이런 곳에!?)

장교 클럽의 점원
곤란해, 너.
애들이 올 곳이 아니야.

오웬
어른이라면 괜찮지.

카인
(오웬……!
네가 데려온 건가!)

(여긴 아서 님에게 있어
적지나 다름없어)

(아무리 나를 괴롭힌다 해도,
해도 되는 일이 있고
안 되는 일이 있는 거잖아!)

(이번만큼은, 용서할 수 없어)

오웬
………….



9화
라스티카의 비밀

장교
이런 늦은 시간에 귀환이라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예정보다 일찍
릴리아나 님의 생가에
인사를 했다. 그뿐이야.

장교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 뒤엔 돌아가십니까?


그럴 생각이다.

장교
실례합니다.
각하, 보고드릴 게…….


뭐지?

……중앙 나라의 아서 전하와
닮은 인물이 있다고……?

호오. 그건 재밌군.

장교 클럽에 가볼까.


라스티카
켈빈과 만나면 좋겠다.

클로에
응…….

라스티카
만약 만나지 못했는데
너무 졸려서 자고 싶어지면
이 근처에 침대를 만들어서 잘까?

꽃과 녹음의 좋은 향기가 나고,
아침 이슬이 맺혀 얼굴에 떨어져서
잠에서 깨는 것도 근사하지 않니?

클로에
그렇네…….

예전에도 있었지, 그런 일.
어디서 노숙하다가 나뭇잎에서
떨어진 물에 와앗! 하고 일어나서.

그때도 라스티카는
근사하다고 했어.
잊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나도 라스티카처럼
어떤 일이라도 근사한 점을
찾을 수 있게 되고 싶어.

라스티카
클로에는 근사한 걸
찾아내는 게 특기야.

네가 만든 옷에는
네가 발견한 근사한 것들이
잔뜩 담겨 있어.

클로에
응……. 고마워…….

라스티카, 나…….
떠오르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하지만,
결국 당신이 정말 좋아.

라스티카
나도 정말 좋아해.

클로에
헤헤…….

현자님 일행, 괜찮을까?
코르테제 성에는 이제
공주님 일행이 없는 거지?

라스티카
그렇지.

클로에
공주님, 어떻게 된 걸까.
그레고리의 말대로 다른 사람인 걸까?

다른 사람이라면
누가 대역을 한 거지?

라스티카
……누가…….

…………!

클로에
라스티카?

라스티카
클로에, 뒤로 물러나 있어.

클로에
으, 응…….

노바
………….

라스티카
……너는…….

노바
라스티카 페르치?

라스티카
네.

노바
비극의 귀공자인가.

라스티카
………….

클로에
라스티카……!

라스티카……!?
어디 갔어, 라스티카!?

방금은 누구지!?
그 녀석이 라스티카를 숨긴 거야!?

라스티카를 돌려줘……!
라스티카……!

……어째서…….


릴리아나
………….

나는 틀리지 않았어.
그분을 지키기 위해…….

노바
릴리아나.

릴리아나
…………!

노바
원하는 대로, 데리고 왔어.

릴리아나
……라스티카 님…….

라스티카
……여기는……?

릴리아나
………….

노바.
당신은 물러나줘.

노바
그렇게 할게. 흥미도 없어.

릴리아나
어서 가.

노바
릴리아나.

기억해 주었으면 좋겠어?

릴리아나
………….

아니.

노바
………….

라스티카
아…….
가버렸어.

여긴 대체 어디일까요?

릴리아나
……아…….

라스티카
무슨 일 있으신가요, 릴리아나 공주.

릴리아나
………….

라스티카 님…….

라스티카
네.

 

릴리아나
자…….

………….

……서쪽 나라의 여왕 아리아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라스티카
아리아…….

……아리아…….

………….

……여기는 서쪽 나라의 왕궁…….

나의 신부…….

마녀에게……, 작은 새로…….

……내가…….

내가……. 여기서…….

아리아, 내가…….

……윽, ……내가…….

릴리아나
라스티카 님…….

라스티카
………….

……어쨌더라…….

릴리아나
………….

라스티카
……기억나지 않아…….

릴리아나
괜찮아요.

라스티카
………….

릴리아나
당신의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라스티카 님…….


클로에
라스티카! 라스티카……!

…………!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져…….

라스티카!?

켈빈
와앗……!

클로에
와아앗……!
앗……. 미, 미안!
놀라게 해서…….

켈빈
…………읏!

클로에
기다려! 가지 마!

알려줬으면 해!
라스티카에 대해…….
라스티카의 신부에 대해!

켈빈
………….

클로에
라스티카는 어째서
신부를 찾고 있는 거야!?

신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건
진짜야!?

라스티카는 어째서,
전부 잊어버린 거야……!?

켈빈
…………. 그건…….

클로에
………….

켈빈
……라스티카 님은…….

라스티카 님은,
나에 대한 것도 잊어버렸어.

클로에
………….
……라스티카의 친구였어?

켈빈
…………. 너는?

넌 누구야?
라스티카 님의 시종?
함께 여행하는 거야?

클로에
나는…….
나는 라스티카의 제자야.

라스티카에게 주워져서
함께 여행하며
라스티카의 신부를 찾고 있어.

지금은 같이 현자의 마법사가 되었고,
앞으로도 함께 있고 싶어.
그러니까……. 알고 싶은 거야.

켈빈
그런가…….
라스티카 님의 제자인 건가.

클로에
응……. 너는?

켈빈
나는……, 음악을 알려주셨어.
알려주시는 걸 조건으로
신부 찾는 걸 도왔어.

클로에
너도……?

켈빈
나도가 아니야.
나만이 도왔어.

클로에
………….

켈빈
아니야. 그게…….
싸우려는 게 아니야.

라스티카 님은
반복하고 있을 뿐이니까.
옛날 일을.

클로에
……어……?

켈빈
그래서 나도 잊혔어.
하지만 괜찮아.

그렇게 심한 일을
기억하고 있으면
라스티카 님이 망가지실 테니까.

클로에
무슨 소리야……?

켈빈
알고 싶어?

클로에
응.

켈빈
정말 알고 싶어?

클로에
………….

켈빈
알아도 구해주지 못해.

과거니까.

마법사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지만,
시간을 되돌리는 건 할 수 없어.

클로에
………….

켈빈
나는 계속 괴로워했어.
혼자 끌어안고 있는 게 괴로워서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살해당하는 게 무서워서
노래로 만들어 숨기고 있는 거야.

사실 같기도 노래 같기도 한,
그런 시늉을…….

클로에
………….

……나는 라스티카의 비밀을
퍼뜨리지 않아.
살해당한다니, 무슨 소리야?

혼자 끌어안거나 하지 않아.
그야…….
라스티카가 함께인 걸.

라스티카는 당신에게
자기 과거를 들어도 된다고
나한테 말해줬어.

켈빈
그래…….

그럼, 알려줄게.

클로에
………….

켈빈
라스티카의 신부는
서쪽 나라의 여왕 아리아 님.

400년 전에 라스티카가 죽였어.



10화
차가운 눈동자의 안내인

레녹스
피가로 님.

 

시노
파우스트……!
피가로! 파우스트는!?

피가로
무사해.

시노
하…….
……으, 다행이다…….

피가로
너희도 만신창이네…….
히스, 보여줘 봐.

히스클리프
……윽, 으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중까지밖에 기억나지 않아서…….

시노는 알아?
노바는 어디로 간 거야?

피가로
노바……?
미스라, 노바와 만났어?

미스라
저는 안 만났어요.
제가 만난 건
해골 인형 같은 녀석뿐이에요.

히스클리프
아……. 네로……!
네로가 브래들리와 함께다.
말고도, 누가…….

시노
네로……!
지하수로에서 만난 녀석이야.
같이 빗자루에 타고 있어.

피가로, 네로도 치료해 줘!
상처가 깊었어…….

네로
……윽, 히스, 시노……!
무사해!? 선생은……!?

레녹스
무사하셔.

네로
다행……. …………큭!

브래들리
위험해, 떨어진다고!
죽기 직전인 주제에 목소릴 키우니까 그렇지!

네로
……윽, ……미안…….

피가로
바빠질 것 같네.
미스라, 공간의 문을 사용해
모두를 마법관으로…….

무르
그럴 필요 없어.

피가로
……이건…….

브래들리
무르……?

어디선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서쪽 마법사 무르 하트였다.

바로 본인이 아닌 것은 알았다.
발밑을 바라보니 부드러운
단모종의 검은 고양이가 있다.

검은 고양이의 목에는
보라색 보석이 장식된
리본이 감겨 있었다.

아마도 이 무르는
실체화된 영혼 조각의 무르다.

영혼 조각이 실체화된다는 건
말로는 들었지만 상상보다
예전의 무르와 흡사했다.

대담하고 오만하며 도전적인 말을 하는 걸
떠올리고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눈앞의 무르는 어딘가
예전의 무르와 인상이 달랐다.

냉혈하고 무자비한 녹색 눈동자…….
무르는 심플하게 짜증 나는 녀석이었지만,
냉혹함이나 사악함은 없었다.

무르가 머금은 냉소에 할 말을 잃는다.

무르
만나서 영광입니다.
우리 세계의 구세주.
현자의 마법사 여러분.

당신들을
서쪽 나라의 왕궁으로 초대합니다.

분명 새로운 주거지를
마음에 들어 하실 겁니다.

레녹스
새로운 주거지……?

피가로
미안하지만 거절할게.
보는 대로 환자가 많아.
마법관에 돌아가서 치료할 거야.

무르
걱정 마시길.
마법관이라면 서쪽 나라의 왕궁에도
준비되어 있습니다.

피가로
뭐라고?

무르는 입꼬리를 치켜세웠다.
차가운 눈동자에는 한 조각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는다.

무르
어서 오세요, 서쪽의 마법관에.
이 자들이 안내할 겁니다.

그렇게 말하며 무르는 고개만 들고
등 뒤를 가리킨다.

그러자 그의 배후에
뼈의 표본 같은 것이 여러 체 출현했다.
10구쯤은 있는 걸까.

섬뜩한 존재다.
생기나 마력은 느껴지지 않지만
대량의 마나석을 압축한 느낌이 든다.

시노의 안색이 변했다.
격양되어 무르를 향해 다가간다.

시노
네가 데려온 건가……!
저 녀석들을……!

레녹스
그만둬, 시노……!

시노
무슨 목적이야!?
저 녀석들 때문에, 다…….

시노가 말을 멈췄다.
레노에게 팔을 붙잡혀서가 아니다.

시노의 앞으로 미스라가 걸어 나왔다.
느긋한 녹색 눈동자가
날카로움을 더해 무르를 바라본다.

미스라
아무래도 좋습니다만…….
설마, 절 협박하려는 건
아니겠죠?

수로 둘러싸는 듯한 방식을
미스라는 불쾌해했다.

무르는 혹독하고 박정하게 눈썹을 치켜든다.

미스라의 긴 손가락 끝 위에
그의 마도구인 해골이 출현한다.

그 순간, 나와 브래들리가
동시에 말렸다.

피가로
그만둬, 미스라.
부상자가 있어.

브래들리
저 녀석이랑 싸워도
넌 마지막까지 서있겠지.

그런데, 그 사이에 여기는 몇 명
돌이 될지도 모른다고.

미스라
………….

미스라는 말없이 무르를 노려본다.
버릇없게 머리를 흔들며
무르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무르
과연. 현명한 판단이야.

파우스트, 네로는 중상이다.
히스클리프와 레녹스도
깊은 상처를 입었다.

피가로
알겠어.
서쪽 왕궁으로 가지.

시노
피가로……!

피가로
단, 깨끗하고 안전한
치료를 할 수 있는 장소를 확보해 줘.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승낙 못해.

무르
좋습니다.
그럼 안내하죠.

무르는 반박하지 않고
부드럽게 인사했다.

거대한 뼈 표본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들이 갈고리 발톱을 추켜올리자
창백한 빛이 모여들었다.

갑자기 공간에 둥근 구멍이 뚫린다.
구멍 너머에서는 엄청난 속도로
경치가 이동하고 있었다.

피가로
공간이동마법도 쓸 수 있는 건가…….

고양이처럼 무르는 눈동자를 가늘게 떴다.

무르
누가 엘리베이터를 만들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등골이 시릴 것만 같았다.
새삼스럽게 이 남자의 존재가
무서워진다.

새삼 후회해도 늦었지만
오랜 역사의 어느 타이밍에
무르를 묻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무르의 영혼 조각은
샤일록이 수집해
무르의 본체에 접목시키고 있다.

〈거대한 재액〉의 영향으로
실체화된 무르의 영혼 조각들은
마음대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이 영혼 조각은
무슨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안 좋은 예감에 눈살을 찌푸린다.
그러자 브래들리가 어깨를 만졌다.

몸을 내밀어 귓가에 속삭인다.

브래들리
어이.
이동한 곳에서 놈들에게 포위되면
부상자와 아이를 데리고 도망쳐.

피가로
너는?

브래들리
흥. 놈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해서
개밥으로 만들어 주지.
개는 좋아하잖아, 새의 뼈.

피가로
저거, 새야……?

브래들리
알았지. 부탁해.

친근하게 등을 두드리며
브래들리는 떠났다.

부탁해, 이런 말을
그가 나에게 할 줄은 몰랐어.
의식이 몽롱한 네로를 언뜻 본다.

도망친 전 부관.
빈사에 빠진 그를 지키고 싶은 거라면,
입장은 똑같다.

미스라
대화 끝났나요?
할게요.

피가로
진정해.
그건 나중에 하자.

미스라
하?

브래들리
초대받아주자고. 서쪽 왕궁에.

공간의 구멍이 벌어져
동그라미 너머로 호사스러운 성을 비춘다.

서쪽 나라의 왕궁이다.

우리는 공간의 구멍을 통해
서쪽 왕궁으로 향했다.


클로에
……라스티카가
신부를 죽였어……?

켈빈
그래.

클로에
그……,
그렇게나 찾아다니는 신부를……?

거짓말이야, 믿을 수 없어…….
적당히 해!
라스티카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켈빈
이게 사실이야.

클로에
………….

켈빈
신부를 죽인 라스티카는
몸부림치며 슬퍼하고
짐승처럼 괴로워했어.

그걸 본
철학자가 조언을 한 거야.

기억이 있어
살아갈 수 없다면
잊어버리라고.

망각은 구원이니까.

그래서 나도 잊혔어.

클로에
……그런…….

켈빈
너도 잊힐 거야.

라스티카가 살아간다는 건,
잊어간다는 거야.

클로에
……어째서…….

어째서, 그런 일이 생긴 거야?

라스티카는 상냥한 사람이야.
신부님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니…….
……그런 거…….

켈빈
……쉿…….

목소리를 줄여.

어디서 듣고 있을지도 몰라.

클로에
누가…….

켈빈
………….

마녀야.

클로에
마녀……?

켈빈
이 나라에서……. 아니…….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숨어.

서쪽 나라에 숨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서쪽 나라를 숨기고 있는 마녀야.

클로에
……서쪽 나라를 숨겨…….

켈빈
그래.
바느질하듯,
교묘하게 진실을 숨겨버렸어.

누군가가 관심을 돌리기 전에…….
피가 흐르기 전에
생긴 딱지처럼 말이야.

그 마녀는 마왕 오즈와는 달라.
불꽃도, 천둥도, 피도 사용하지 않아.

무관심과 거짓말과 소동과 소문으로
진흙을 발라 진실을 메우는 거야.

누구나 흥미를 잃고 있을 때
지루한 사건인 척하고
그렇게 덮어.

진실을 깨달은 자는
자비 없이 죽이고.

클로에
………….

켈빈
영광을 누리던 페르치 가문이
몰락한 것도
그 마녀가 저주해서 죽였기 때문이야.

왕녀 아리아를 저주해 작은 새로 만든 것도
그 마녀의 소행이야.

진실을 알리려다
나도 살해당할 뻔했어.
그래서 여기까지 도망쳐온 거야.

이제 비극의 귀공자 이야기를 아는 건
발푸르기스의 밤에 모이는
몇 안 되는 마법사들 뿐…….

클로에
그 마녀는 누구야……?
아직 살아있어……?

켈빈
………….

그래. 서쪽 왕궁에 있어.

잊힌 왕녀 자라.

마녀로 태어난 탓에
숨겨져 자란, 아리아의 쌍둥이 언니야.


릴리아나
………….

……물을 수 없었어…….
나를…….

???
자라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1. 浮薄, 천박하고 경솔함, 경박.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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